마곡사가 위치한 곳의 물과 형세는 태극형이라고 하여 택리지 정감록 등 여러 비기에서는 전란을 피할 수 있는 심승지지의 하나로 꼽고 있다.
절의 창건 및 사찰명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첫번째 설은 640년(선덕여왕) 당나라에서 귀국한 자장이 선덕여왕에게서 하사받은 전(田) 200걸로 절을 창건하기 위한 터를 물색하다가
통도사, 월정사와 함께 이 절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자장이 절을 완공한 뒤 낙성식을 할 때 그의 법문을 듣기 위해서 찾아온 사람들이 '삼(麻)와 같이 무성했다'고 하여 '마(麻)'자를 넣어 마곡사라고 하였다는
설이 있다.
두번째 설은 신라의 승 무염이 당나라에서 돌아와 이 절을 지을 때 스승인 마곡보철을 사모하는 뜻에 이곳에 마씨(麻氏) 성을 가진 사람들이
살았기 때문에 마곡사라 하였다는 설이 있다.
창건 이후 이 절은 신라말부터 고려 초까지 약200년 동안 폐사가 된 채 도둑떼의 소굴로 이용되었던 것을 1172년(명종2)에 보조국사 지늘이 제자 수우와 함께
절을 중창하여고 할 때 도둑들에게 물러가 것을 명하였으나 도둑들은 오히려 국사를 해치려 하였다
이에 보조가 공중으로 몸을 날려 신술(神術)로써 많은 호랑이를 만들어서 도둑에게 달려들게 하였더니 도둑들이 혼비백산하여 달아나거나
착한 사람이 되겠다고 맹세했다고 한다.
두둑들에게 절을 되찾은 보조는 왕에게서 전담 200결을 하사받아 대가람을 이룩하였다.
당시의 건물은 지금의 배가 넘었으나 임진왜란 때 대부분 불타버렸다. 그 뒤 60년 동안 폐사가 되었다가 1651년(효종 2)에 각순이 대웅전
영산전 대적광전 등을 중수하였다.
일제 강점기의 31본산(本山)시대에는 도내 100여 사찰을 관장하는 본산이 되었다.
이 절은 김구(金九)와 인연이 깊은 사찰이다.
한말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한 일본인 장교 쓰치다를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 나루에서 죽인 김구는 인천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다가
탈옥하여 이 절에 숨어서 승려를 가장하여 살았다.
지금도 대광명전옆에는 김구가 심은 향나무가 있는데 그 옆에 '김구는 위명(僞名)이요 법명은 원종이다'라고 쓴 푯말이 꽂혀있다.
현재 이절은 충남 70여 개 말사(末寺)를 관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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