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봉산 둘레길에서 담은 풍경
* 언제 : 2011. 6. 11.(토)
* 누구와 : 옆지기와 둘이서
* 날씨 : 맑음, 초여름의 무더위를 느끼게 하는 기온
* 코스 : 우이동 우이령 입구~진흥교회옆 ~ 연산군묘~무수골~능원사~도봉탐방지원센터
↓ 우이령입구에서 본 우이암
↓ 원당샘
↓ 은행나무
☞ 이 은행나무는 서울시 지정보호수 제1호 높이24m, 둘레 9.6m, 수령 800~1,000년
↓ 은행나무
↓ (좌측)연산군묘
☞ 연산군(1476~1506년)은 성종과 윤기무의 딸 페비윤씨 사이에서 태어나 7살의 나이에 세자에 책봉되어 19세에 조선
왕조 제10대 임금이 되었다. 연산군은 붓글씨를 잘 쓰고 실록에 실려 있는 시가 130여편이나 될 정도로 시를 잘 짓는
임금이었다.
↓ 포도나무
↓ 쌍둥이 전망대 건설중
↓무수골
↓ 능원사
↓ 도봉탐방지원센터
↓도봉산역 전경
↓7호선 지하철 도봉산역
♣ 도봉산 둘레길 지도
♣ 연산군에 대하여.......
서울 도봉구 방학동에 있는 연산군(1476∼1506년)의 무덤은 평범하다.
크지도 작지도 않다. 한양의 평범한 양반가 무덤 정도나 될까.
왕릉에서 흔히 보이는 각종 동물석상(말, 양, 호랑이)이나 십이지신상, 무덤병풍석이 없다.
묘비명도 그냥 ‘연산군지묘(燕山君之墓)’이다.
그의 동갑내기 부인 신씨(1476∼1537년)도 바로 왼쪽에 누워있다.
역시 비석엔 ‘거창신씨지묘(居昌愼氏之墓)’라고 새겨져 있다.
세월에 닳고 닳아 손가락으로 만져봐야 헤아릴 수 있다.
그들은 1488년 겨우 열두 살 때 혼인했다.
부부 이전에 ‘어릴 적 같이 놀던 소꿉동무’였던 것이다.
조선왕조에서 능(陵)은 왕과 왕비의 무덤이다.
원(園)은 왕세자, 왕세자비, 임금 어버이의 무덤을 말한다.
묘(墓)는 왕의 아들딸과 왕의 후궁이 묻힌 곳이다.
연산군은 한때 왕이었지만 폐위됐으므로 성종(1457∼1494, 재위 1469∼1494년)의 첫째 아들로 대우한 것이다.
연산군은 12년 동안 임금 자리(1494∼1506년)에 있었다.
탈도, 말도 많았다.
무오사화(1498년), 갑자사화(1504년)로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날마다 잔치를 벌여 ‘흥청망청’이란 말까지 생길 정도였다.
성균관은 유흥장이 됐고, 임금에게 목숨을 걸고 직언을 하던 사간원과 홍문관은 폐쇄됐다.
오죽하면 연산군 앞에서 줄을 타던 광대가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한다”고 비아냥댔을까.
연산군은 여리고 감수성이 풍부했다.
내로라하는 영화배우들이 너도나도 그 역을 맡았던 이유일 것이다.
신영균 이대근 임영규 유인촌 유동근 노영국 정진영 정태우…. 정치와는 처음부터 맞지 않았다.
그 덕분에 그의 배다른 동생 진성대군(중종·1488∼1544)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연산군은 동생을 전혀 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다른 임금이라면 일찌감치 없애버렸을지도 모른다.
연산군은 시인 쪽에 더 가까웠다.
실제 그가 지은 시가 130여 편이나 전해진다.
‘용렬한 자질로 임금 자리에 앉은 지 10년이 되었건만/
너그러운 정사 못하니 부끄러운 마음 금할 수 없네/
조정에 보필하고 종사 생각하는 자 없으니/
나이 어린 이 몸이 덕이 없나 보구나’ (갑자사화 나던 1504년 3월)
‘너무 애달파 눈물 거두기 어렵고/
슬픔이 깊으니 잠조차 오지 않네
/마음이 어지러워 애끊는 듯하니/
이로해서 생명이 상할 줄 깨닫네’ (1505년 9월)
연산군의 광기는 어디로 튈지 아무도 몰랐다.
그 누구도 제어할 수 없었다.
오직 후덕한 신씨만이 그를 눈물로 달랬다.
연산군은 신씨의 말만은 다소곳이 들었다.
하지만 행동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1506년 9월 연산군은 강화 교동도로 위리안치됐다.
집 안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물론 집 밖으로 나가봐야 바다가 가로막고 있을 터였다.
교동도는 강화섬 옆구리에 붙은 외딴섬인 것이다.
강화섬에서 배로 15분쯤 걸린다.
연산군은 뛰다 죽고 싶을 정도로 답답했을 것이다.
자유분방한 기질에 피 끓는 나이 서른.
호리호리한 몸매에 갸름하고 곱상한 얼굴. 춤 잘 추는 하얀 피부의 꽃미남.
그림과 글씨를 좋아했던 임금. 결국 그는 두 달 만에 시름시름 병을 앓다가 “신씨가 보고 싶다”며 죽었다.
그리고 그곳에 묻혔다.
연산군 부인 신씨는 살아남았다.
한양 밖으로 쫓겨나지도 않았다.
그것은 신씨의 어질고 착한 성격 덕분이었다.
쿠데타세력은 신씨를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다.
중종도 ‘군부인(君婦人)’으로 강등됐는데도 ‘빈(嬪)’이라고 부르며 왕세자부인 대우를 해줬다.
1513년 신씨는 중종에게 간청하여 연산군의 묘를 지금자리로 옮겼다.
그리고 1537년 신씨는 눈을 감았다.
연산군보다 31년이나 더 살다가 그의 곁에 묻혔다. 고단한 세월이었다.
♣ 둘레길에 대하여.......
왕실묘역길(1.6km, 우이령길입구~정의공주묘)에서는 다양한 역사문화재와 굴참나무 밭배나무와 같은 활엽수로 이루어진 숲을
동시에 감상하며 산책할 수 있는 구간이다.
성종의 맏아들로 중종반정 때 폐왕된 연산군의 묘와 세종대왕의 둘째 딸로 훈민정음 창제에 크게 기여한 정의공주의 묘가 있어 왕실묘역
길이라고 이름 지어졌다.
또한 수령 800~1,000년이 달하는 '서울시 지정호보수 제1호인 은행나무'와 은행나무가 마시고 자란다는 '원당샘'을 볼 수 있는 왕실
묘역구간은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함께 읽어면서 걸을 수 있는 길이다.
방학동길(3.1km, 정의공주묘~무수골)은 방학동이 한눈에 보이는 쌍둥이 전망대를 지나 능선을 따라 걸을 때면 도봉산의 봉우리가
줄지어 있는 장관을 감상할 수 있다.
방학동이란 동명에는 조선시대 어느 임금이 도봉서원의 터를 정하기 위해 도봉산 중턱에 앉아 있다가 학(鶴)이 평화롭게 놀고 있는 것을
보고 방학(放鶴)이라 하였다는 유래가 있다.
한편으로는 방학동이 학이 알을 품고 있는 것 같다고 하여 방학이란 이름 지었다는 이야기도 전하고 있다.
도봉옛길(3.1km, 무수골~다락원)의 시작은 무수골에서 시작된다. 오늘 탐방은 도봉탐방지원센터까지만 하고 나머지 구간은 다음에
탐방하기로 하고 마무리 한다.
근심걱정이 없다는 뜻을 가진 무수골은 조선왕조의 일원이었던 이인 후손이 살고 있는 골짜기로 일반적인 왕족무덤에 비해 화려하지
않고 단아한 모양새를 하고 있는 무수골 왕족묘가 있는 곳이다.
이 구간에는 도봉산에서도 이름난 3개의 사찰인 도봉사, 능원사, 광륜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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