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K)서울圈

[서울]숲속의다리 호경암 삼청공원 경유 김신조루트 탐방

마하칼라 2010. 3. 14. 20:27

 

김신조루트 산책하며 담아 본 추억꺼리

(1.21.사태 흔적)

                                                                              

 * 때 : 2010. 3. 14.(일)

 * 누구와 : 옆지와 둘이서

 * 날씨 : 구름낌, 하산길에 보슬비가 조금 내림

 * 교통 : 지하철과 마을버스(갈때 : 4호선 한성대역 6번 출구 앞 01번 마을버스로 성북구구민회관까지, 올때 : 감사원 3별관 앞에서 마을버스로 안국역

 * 탐방코스 : 하늘한마당~다모정~숲속다리~하늘교(하늘마루)~하늘전망대~호경암~서마루~성북천발원지~말바위~삼청공원

   ☞ 김신조루트 탐방코스의 상세내역은 맨아래 지도 참조

 

 ▼ 호경암(북악산 김신조루트 2산책로)

 

▼ 하늘한마당(들머리, 성북동 한진 한신아파트 뒷편)

 

▼ 성북동 산책로 입구의 안내도

 

▼ 성북동(산책들머리)에서 본 남산

 

 

 

▼ 다모정 쉼터의 안내도

 

▼ 숲속다리

 

▼ 숲속다리

 

 

 

▼ 숲속다리 아래 도로

 

 

▼ 뒤돌아 본 숲속다리 방향 등로 

 

▼ 정릉을 등지고

 

▼ 3월 9일밤 폭설로 부러진 소나무

 

 

 

 

▼ 북악산과 북한산 잇는 다리 ('10. 3. 14. 다리 난간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었음)

 

▼ 하늘마루의 안내도

 

▼ 북한산(좌측 보현봉, 가운데 형제봉)

 

▼ 하늘전망대에서

 

 

▼ 호경암에서 본 북악산(우측)

 

▼ 호경암에서 본 남산(우측)

 

▼ 호경암에서 본 (성북동)들머리

 

▼ 호경암(1. 21. 사태 격전지) 표지석

 

 

 

 

▼ 호경암 앞의 '68. 1. 21 사태 격전기

 

▼ 호경암 앞에서("이 자국이 '68. 1. 21 사태 총탄 흔적이다")

 

▼ 호경암의 1. 21. 사태 총탄 자국

  

▼ 호경암의 1. 21. 사태 총탄 자국

 

▼ 호경암의 1. 21 사태 총탄 자국

 

▼ 호경암

 

▼ 호경암 앞 '68. 1. 21. 사태 격전기를 읽는 등산객 

 

▼ 호경암 앞 현수막('09. 10. 24자 중앙일보 기사)

 

 

 

 

 

 ▼ 하산길(빗방울이 떨어져 웃옷을...) 

 

 

 

▼ 성북천발원지

 

▼ 성북천발원지 옆 등로(가운데길 팔각정 방향, 우측 호경암 방향)

 

▼ 숙정문 안내소

 

 

 

▼ 팔각정

 

▼ 서울성곽

 

▼ 서울성곽

 

 

 

▼ 말바위 부근 서울성곽 

 

▼ 말바위쉼터 안내소

 

▼ 기관총 거치대

 

▼ 말바위

 

▼ 말바위

 

▼ 말바위 옆 산책로

 

 ▼ 삼청공원 가는길

 

 

 

 

▼ 삼청공원 가는길

 

▼ 삼청공원의 등산로 안내문

 

▼ 삼청공원 안내도

 

 ▼ 삼청공원

 

▼ 삼청공원

 

▼ (삼청공원) 이정표

 

▼ 북악산

 

▼ 귀가길에 담은 감사원 본관

 

▼  마을버스 하차 후 안국역 가면서 담은 헌법재판소

 

▼ 헌법재판소 앞

 

 

♧ 북악산 김신조루트 특징

 

    ☞ 어제 13일 예봉산(683m)을 나녀온 후 TV만 보고 하루를 보내기 아쉬움이 있어

      지난달('10. 2. 27.)  북악스카이웨이 북악하늘길 제3산책로  열렸다는 소식을 며칠전 인터넷을 통해 접하고 있던 차에

      점심을 먹고 집사람과 여기를 탑방하기로 베낭을 메고 나섰다.

 

      북악하늘길은 '68. 1. 21.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습격사건으로 42년간 통제되었던 구간이다. 

      북악하늘길 제1산책로 '말바위쉼터~삼청터널위~북악산팔각정'은 '09. 3월 개방되었고,

      제2산책로(일명 김신조루트) '성북천발원지~호경암~하늘마루'는 '09. 8월 개방되었으며,

      제3산책로 '숲속다리~동마루~북카페' 가 마지막으로 올(2010년) 2월 개방되었다.

     

      산행 코스의 중간중간 군사작전용으로 만든 좁다란 시멘트 계단이 많다,

      김신조루트 제2산책로의 호경암은 68년 1. 21. 사태 당시 총격전이 있었던 곳으로

      50여개 탄흔이 그대로 남아 있다. 눈에 잘띄도록 하기 위해 탄흔 주위에 페인트로 표시를 해놓았다.

      '북괴의 잔악성에 대한 경각심을 고취'하기 위해 안내문도 세워져있다.

      등로 군데군데에 군사시설이나 벙커 등이 옛 군대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쉬엄쉬엄 걸어면서 사진도 찍고 준비해간 차도 마시고 간식도하면서 여유를 가지고 다녀올 계획이 '하늘전망대'에 이러니 

      가는 빗방울이 떨어져 "더 많이 오기 전에 빨리 내려가자"는 옆지기의 간청에 할 수 없이  조금 빨리 발길을 재촉하여

      호경암, 성북천발원지, 숙정문안내소, 말바위를 거쳐 삼청공원으로 날머리를 잡아 내려왔다.

 

                                 <1968년 김신조 남파 루트>

         

 

 

             ☞ '68. 1. 21. 사건 개요

 

                 '68년 1월 17일 밤 10시 북한 124군 소속 31명이 군사분계선 철조망을 절단하고 남측으로 넘어 왔다.

              기관총, 권총, 수류탄, 대전차지뢰 등으로 무장한 채. 앉은걸음으로 얼어붙은 임진강을 건넌 뒤 파평산(496m)에 도착

                         

              18일 새벽 그들은 삼봉산(282m)에 도착, 1박을 했다. 

              낮 12시경 나무하러 온 우철제(당시 21세)씨 등 4명을 억류했다.

 

              김신조일당 공비들은 이들의 처리를 북측에 물었으나 돌아온 암호문을 해독할 수 없어 이들을 풀어 줬다.

              우씨 일행은 곧장 경찰에 신고했고, 군경 비상경계가 내려졌다. 나중에 해독된 암호문은 '원대복귀' 였다.

 

              19일 밤 김신조 일행은 고령산 앵무봉(622m)을 통과, 북한산 어귀에 다다랐다. 북한산에서 발원해 한강으로 빠지는

              창릉천 이다.   그 너머에 구파발과 송추를 잇는 비포장도로가 있었다.

 

              비상경계를 서는 군인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1명씩 도로를 건녔다. 한데 그들이 도착한 곳은 지도에는 없는 진관사 였다.

              근처에서 1박하고, 다음 날 밤엔 사모바위를 지났다. 밤새달렸지만 출발지점의 코앞으로 되돌아 왔다.

 

              당시 김신조일행은 환상방황(環狀彷徨 : 혹한과 피로 누적 등 극한 상황에서 판단력이 떨어져 주변을 맴도는 현상)

              빠져 시간을 지체했다.

 

              21일  비봉에서 승가사로 이어지는 산악길을 타고 이날 밤 10시경 서울시내 세검동 파출소 관할 자하문 초소에 이르렀다

              초소검문 경찰관이 검문을 실시하자 "우리는 방첩대원이다. 신분증을 볼 필요가 없다. 못 믿으면 우리 부대로 가자"라는

              위협적인 언사와 함께 행진을 계속했다.

 

              이에 급보를 받은 종로경찰서장과 경찰병력이 출동하여 검문을 요구하자 일당 중 한명이 최규식 서장을 그대도 사살하고

              자동소총을 발사하는 동시에 수류탄을 투척하였다.

              이들은 지나가는 버스에 수류탄을 던지는가 하면(귀가길 무고한 시민 살상), 무장한 채 뿔뿔이 흩어져 인근 민가를 습격,

              만간인 5명을 사살하기까지 하였다.

 

              사건 발생 후 서울시내 일원에 비상경계령을 내리고 공비소탕작전을 31일까지 전개하여 28명을 사살하고 기관단총 31정

              등 다량의 무기를 노획하였다.

             1월 22일 새벽 1시 30분 자하문 밖 인왕산 기슭에서 김신조를 생포하였고 나머지 2명은 도주 것으로

              파악되었다. 

 

              그 도주한 자는 이후 남파 특수부대의 지휘관이 되어 영웅대접을 받고 있다는 말을 한 귀순자를 통해 듣게 됐다.

              '68. 1. 31일까지 전개한 공비소탕작전 중 무장공비와 교전을 벌인 역사의 흔적을 호경암이 정확히 말해주고 있다.

         

    

       ☞  1. 21 사건(청와대 습격사건) 생포자 김신조 증언

 

               "월래 남파조는 5개조, 76명으로 구성 됐습니다. 1조는 청와대, 2조는 미 대사관, 3조는 육군본부, 4조는 서울교도소,

              5조는 서빙고의 간첩수용소를

               각각 목표로 삼았었지요. 그런데 상부의 지시로 실제 남파 공작원은 31명으로 축소 됐던 거예요.

              (청와대 습격당시에) 남한 군과 경찰의 방비는

              허술하기 짝이없었어요. 만일 당초 예정대로 5개조가 모두 내려왔다면 서울 시내는 쑥대 밭이 됐을 겁니다."

 

              김씨는 열변을 토하면서 "당시 언론에 보도된 일부 내용은 사실과 상당히 달랐다"며 "군인과 경찰, 민간인 등 희생자는

              일반에 알려진 것보다 훨씬 많았고, (나를 제외한) 나머지 30명 전원이 사살됐다는 것도 사실과 다르다.

              북으로 도주한 공비가 한 명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정도 내용은 그리 새삼스러운 게 아니다. 당시 사건 관계자들의 직간접적인 증언을 통해 어는 정도 알려진 내용이다.

              김씨의 사전에세이 《나의  슬픈 역사를 말한다》에도 상세하게 기록돼 있다.

              하지만 뒤이어 그의 입을 통해 흘러나운 내용은 듣는이의 귀를 쫑끗하게 했다.

 

                "그때 도주한 사람이 누군지 아세요. 그 사람이 바로 (몇 해 전) 송이버섯을 들고 서울 땅을 밟은 사람이에요.

               참으로 어이없지 않습니까?. 청와대를 치러 왔던 사람이 아무리 세월이 흘렀다고 해도 송이버섯까지 들고 버젓이

               찾아왔으니.... 나를 좀 만나게 해주지. 왜 그냥 보냈는지 모르겠 습니다."

          

                김씨의 너스레에 장내에선 잠시 웃음이 터져 나왔지만, 참석자 상당수가 뜻밖의 내용에 놀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30여년 전 남한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았던 무장공비가 송이버섯을 들고 다시 서울을 왔다갔다니 쉽게 믿기지 않을 만도

                했다.

                이름은 언급하지 않았지만, 2000년 9월 11일 송이버섯을 들고 서울을 방문했던 북한인민군 총정치국 부총국장 박재경

                대장 지칭하는 것이 분명했다.

 

                 당시 박 부총국장은 김정일 위원장의 특사자격으로 남한을 방문한 김용순 당 중앙위 대남담당비서 일행원 중 가장

                 주목을 받았다.

                 군사적 긴장완화 문제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던 시기인지라 그의 방문으로 남북한 군 당국자간에 실질적인 논의가

                 이뤄질 것이라는 기대를 모았기 때문이다.

 

                 국방부는 조성태 국방장관의 정책보좌관 김종환 중장을 공항에 보내 영접하고, 조 장관과의 만남을 제의 했다.

                 그러나 박 부총국장은

                 이를 거절하고 송이버섯만 우리측에 전달한 채 6시간 만에 북한으로 돌아갔다. 김씨의 목소리가 더욱 높아졌다. 

    

 

 ♧ 북악산 탐방코스